디지털 시대에 서점에 가서 종이책을 펼쳐드는 어느 ‘ 애서가 ’ 의 고백
*지식인의 서재 :서울대학교 빅데이터 기반 지식정보플랫폼 LikeSNU에서는 우리 사회 각 분야 지식인의 마음 속 서재에 꽂혀 있는 다양한 책들을 소개합니다. 첫 번째 지식인의 서재로 우리 대학 동문이자 숭실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인 정인관 지식인 의 서재를 소개합니다.
| 1. 프롤로그
2025 년 새해 벽두 , “ 애서가이자 사회학 전문가인 교수님께 < 지식인의 서재 > 1 호 글을 청탁 ” 한다는 도서관 담당관 선생님의 이메일을 확인하고 잠시 묘한 감정을 느꼈습니다 . ‘ 애서가 ’ , ‘ 전문가 ’ , ‘ 지식인 ’ 이라는 단어가 저를 표현하기엔 조금 과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. 아니 , 분명 그 단어들은 제 스스로 그렇게 보이길 바라는 상 (image) 이긴 하지만 , 그러한 전략이 나름 ‘ 성공적 ’ 이었음을 이메일을 통해 확인한 순간 오히려 그 상과 현실의 간극 사이의 심연에 빠져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.
‘ 전문가 ’ 의 사전적 정의는 “ 어떤 분야를 연구하거나 그 일에 종사하여 그 분야에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 ” 입니다 . 저는 학부부터 대학원까지 사회학을 공부해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상당한 지식과 경험을 갖췄다고 말하기는 민망합니다 . 전공분야인 불평등에 대한 제 낡은 지식이 어디선가 들통이 날 것 같아 깊이 있는 질문이라도 나올려 치면 줄행랑을 친지가 오래입니다 . 한편 ‘ 지식인 ’ 의 사전적 정의는 “ 일정한 수준의 지식과 교양을 갖춘 사람 ” 입니다 . 오랫동안 이것저것 들추다보니 어떤 분야에 대해 얄팍한 지식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많은 영역에 있어서는 기본적인 소양도 갖추지 못했음을 확인할 때가 많습니다 . 상황이 이렇기에 스스로를 ‘ 지식인 ’ 이라고 명명하는 것은 진짜 지식인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 생각합니다 . 마지막으로 ‘ 애서가 ’ 는 “ 책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 ” 을 뜻합니다 . 한국어 위키백과의 ‘ 애서가 ’ 항목을 찾아보니 “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애서가는 독서를 좋아하는 것을 떠나 책 자체를 애호하고 수집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” 고 적혀 있네요 . 애서가라면 마땅히 책을 수집하는 것을 넘어 그것을 빠짐없이 읽는 사람을 가리킨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, 수집에 방점이 찍혀있다니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칭호 (!) 를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. 이렇듯 두서없는 반성적 사유로부터 시작된 이 글은 어느 애서가가 쓰는 책 수집의 기록이자 변명이며 , 다른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바라보는 관찰기이자 정기적으로 책 몇 권씩 구입해 책상에도 쌓아놓고 가끔은 손에 쥐고 다니면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는 호소문이기도 합니다 . 대한민국에서 두 세 손가락에 꼽힐 만큼 많은 책을 보유하고 있는 매력적인 곳 (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!) 에서 제공하는 콘텐츠의 일부 ( 게다가 1 호라니 !) 로 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눈다고 생각하니 민망함을 동반한 ‘ 묘한 감정 ’ 은 어느새 사라지고 들뜬 마음만 남았네요 .
| 2. 책 구경 , 책 구입 , 책 읽기
어린 시절 저희 집에는 책이 정말 많았습니다 ( 사실 저의 기여로 인해 지금은 더 많은 책들이 있습니다 ). 책장을 기어 올라가다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던 기억 , 여기저기 쌓여있는 책들을 무너뜨린 기억 , 한글을 처음 배우며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한자 한자 읽었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있습니다 . 그 중 한 권인 < 영구혁명론 > 의 제목을 또박또박 읽으며 ,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개그 캐릭터인 ‘ 영구 ’ 에 대한 책인 줄 알고 “ 영구가 왜 혁명을 해 ? ” 라고 부모님께 여쭤봤던 적도 있습니다 ( 과연 ‘ 혁명 ’ 의 뜻은 알았을까요 ?). 이렇듯 어릴 적부터 책이라는 ‘ 물질 ’ 은 제겐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. 나중에 사회학 연구를 하면서 한 사람의 ‘ 문화자본 ’ 을 측정하는 문항 중 하나가 ‘ 어린 시절 집에 얼마나 많은 책이 있었는지 ’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. 문화자본이란 개인이 특정한 사회적 지위를 얻거나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는 지식 , 기술 , 교육 , 그리고 문화적 취향을 포함한 비물질적 자원을 의미합니다 . 책에 대한 물질적 익숙함은 그것을 펼쳐보고 그 안에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을 제공하며 , 이렇게 습득된 지식은 한 사람의 학업 성취와 사회적 성공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. 자라는 과정에서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지만 , 책이 있는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끼게 된 저는 부모님을 따라 서점에 갈 때면 그 안에서 오랫동안 잘 머물렀습니다 . 책 표지를 비교하며 이 책보다 저 책이 더 예쁘게 잘 만들었다는 평가를 했고 , 책 안쪽을 들여다보며 작가의 약력을 읽기도 했습니다 . 서점에 왔으니 책 한권 골라보라는 부모님의 제안에 가장 그럴듯한 표지의 책들을 집어들기도 했습니다 . 돌이켜보면 어린 나이에 읽기엔 지적으로 무리인 책들도 많았지만 부모님께선 제가 고른 책들을 ( 그것이 미성년자가 보기에 부적절한 것만 아니라면 ) 검열하지 않고 사주시곤 했습니다 .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어머니께서 손에 쥐어주신 오천 원이나 만 원권 한 장을 손에 쥐고 혼자 서점에 갈 때도 많았습니다 . 그렇게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을 지내다보니 80 권짜리 해적판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, 조정래의 < 태백산맥 > 과 박경리의 < 토지 >, 도올 김용옥의 책들 , 심지어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 전문적인 책들 ( 대표적으로 린 챈서의 < 일상의 권력과 섀도매저키즘 > 이라는 책 ) 이 책장을 가득 채우게 되었습니다 . 책장의 빈칸에 책을 한권씩 꽂을 때마다 느낀 희열은 수십 권의 위인전 전집이나 백과사전이 한 번에 책장을 채우던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. 주로 베스트셀러였던 책들이 제 방에 쌓여가자 저 안엔 무슨 내용이 담겨 있기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찾아 읽는지 궁금해졌습니다 . 구입한 책들의 일부를 그렇게 읽기 시작했습니다 . 세 가지 요소의 화학적 결합이 제게 책읽기의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. 내용 , 책의 질감 , 종이 냄새가 그것입니다 .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작가의 필력 , 조금은 까끌까끌한 종이와 활판인쇄 특유의 요철 ( 凹凸 ) 감각 , 시간이 깊이에 따라 그 향이 다른 종이 냄새는 글의 내용에 입체감을 더해줬고 어떤 책에 대한 기억을 저장하는데 있어 어느 하나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. 책의 어디쯤에 어떤 내용이 있었는지 감각적으로 기억하는 습관도 생겼는데 , 아직도 종종 ‘ 거기 책 중간 부분 접힌 곳 오른쪽 위 ’ 란 식으로 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위치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. 이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서재와 연구실에 책이 쌓여가면서 이북을 통해 책을 읽으련 시도를 해본 적도 있습니다 .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제게 있어 책의 물질성이 독서행위의 한 축이며 , 매끈한 화면을 통해 활자를 읽는 것으로는 독서의 기억을 완성할 수 없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. 세 번의 시도과정에서 구입한 세 개의 이북 리더기는 이러한 깨달음을 거쳐 다른 누군가의 것이 되었습니다 .
| 3. 도서관 , 빌려 읽기
사실 지금 제게 책은 웬만하면 ‘ 사야하는 것 ’ 입니다만 부지런히 빌려 읽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. 21 세기의 첫해 대학에 입학해 중앙도서관에 처음 발을 내딛었던 3 월의 어느 날 , 저는 그 안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. 방금 전까지 인문학 서가를 거쳤던 것 같은데 , 별 생각 없이 걷다보니 알 수 없는 자연과학서적의 숲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. 뭔가 불친절하고 거대한 공간에 갇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던 순간 , 이 책들도 어차피 나랑 비슷한 지력을 갖춘 사람들이 펼쳐보는 것이란 근거 없는 자신감에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인 , 블랙홀과 관련된 책을 한 권 뽑아 대출했습니다 . 몇 달이 지나 절반도 읽지 못한 채 지각 반납해 연체료까지 내야했으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간 게 분명한 그 책에 묻어 있는 흔적 , 서가의 수많은 다른 책들과 이웃해 살며 묻은 도서관 특유의 향기는 새 책들을 모아놓은 서점에서 만날 수 있는 그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. 이후 자주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, 서가 끝 창문 앞쪽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책 읽기를 즐겼습니다 . 여담으로 이때 어떤 학생이 창문 밖으로 읽던 책을 던지는 것을 보았는데 , 같은 장면을 훗날 학과는 다르지만 저와 동갑이고 동기인 서울대 출신 감독이 만든 어떤 영화 (< 들개 > 라는 제목의 독립영화입니다 ) 에서 마주하기도 했습니다 . 술술 읽히는 책보다는 , 그렇지 않아서 도서관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책들을 주로 빌렸습니다 . 저보다 앞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누구일지 , 이 책을 읽은 사람들은 또 다른 어떤 책들을 읽을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(LikeSNU 시스템의 출범을 보며 남다른 감회에 젖었던 이유입니다 ). 도서관이 전산화되기 전에는 책 맨 뒤에 대출카드가 붙어 있었는데 그 카드에는 빌린 사람의 이름과 대출 날짜 및 반납 날짜가 시간 순서대로 적혀있었습니다 . 2001 년에는 이미 중앙도서관도 전산화가 되었지만 아직 제거되지 않은 대출카드가 붙어 있는 오래된 책들을 종종 만날 수 있었습니다 . 그 목록에서 저보다 20 년 앞서 같은 책을 빌려 읽은 교수님의 이름을 확인할 때면 도서관이란 공간이 더 친근하고 , 좁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. 학부생과 대학원생 , 그리고 연구원 신분으로 서울대에 머물렀던 기간은 군 휴학을 제외하고도 8 년인데 그 뒷부분까지도 중앙도서관에서 종종 길을 잃곤 했습니다 . 다만 어느 순간부터는 길을 잃어버려도 더 이상 무섭지 않았습니다 . 나가는 찾으려하기보단 ‘ 아직도 처음 와본 공간이 있다니 ’ 란 감탄을 내던지고 , 한 구석에 앉아 눈앞의 아무 책이나 펼쳐보기도 하고 , 손에 쥐고 있던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. 최근에 업무차 중앙도서관에 들렀다가 서가의 꽂혀있는 책들을 보며 오래전 제가 읽었던 책들 중에도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떨리기도 했습니다 . 제 마음과는 별개로 사실 여러 통계수치는 오늘날 사람들이 과거에 비해 책을 덜 읽고 있다고 말합니다 . 대학생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. 굳이 책을 읽지 않아도 더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게 정말 많은 세상입니다 . 읽을 것도 , 빠르게 정보를 얻을 수 있는 통로도 정말 많아 책을 읽는 것의 효용성이 점차 평가절하 되는 디지털 세상에서 책 , 그 중에서도 종이책의 미래는 불투명해보입니다 . 흥미로운 현상은 종이책을 읽는 것이 낡고 드문 행위가 되어감에 비례하여 종이책 독서가 힙 (hip) 한 행위이자 타인과의 ‘ 구별짓기 ’ 의 대상이 된다는 것입니다 .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(instagrammable) 예쁜 책을 찾는 사람들과 , 이에 맞춰 리커버북을 출간하는 출판사들의 모습을 보며 종이책의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을 느껴봅니다 .
| 4. 2024 년의 서울대 학생들은 어떤 책을 읽었을까 ?
문득 요즘 후배들은 어떤 책을 즐겨 읽을지 궁금했습니다 . 서울대 도서관의 ‘ 2024 년 독서 트렌드 데이터 ’ 파일을 살펴보니 학부생 최다 대출도서 10 위 안에 열 권 중 일곱 권이 문학작품 , 한권은 회고록 , 한권은 과학 에세이 ( 어쩌다보니 저자분과 유튜브를 한 편 같이 찍은 적이 있어 더욱 반가운 마음입니다 ), 다른 한권은 심리 관련 책이네요 . 역시 전공을 뛰어넘어 가장 소구력이 있는 건 문학작품 , 그 중에서도 소설이었습니다 . 연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( 학부생 최대 대출도서 1 위는 한강의 < 작별하지 않는다 >) 이 2025 년 이러한 독서 트렌드를 한층 강화시킬지 궁금해집니다 . 제가 읽어본 책도 여덟 권이나 되니 ( 자랑 맞습니다 ) 혹시라도 학생들을 만나면 뭔가 나눌 수 있는 대화의 고리가 있겠구나 싶은 생각에 절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. 스무 해 전에도 시오노 나나미의 < 로마인 이야기 > 와 한비야의 여행기가 최고 인기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. 황석영 , 조정래 등의 소설이 오랫동안 수많은 학생들의 손을 탔던 기억도 생생합다 . 학부 1 학년 대출도서 9 위가 박경리의 대하소설 < 토지 > 인걸 보며 좋은 책은 시대를 넘어선다는 교훈을 떠올립니다 . 초점을 학술서적으로 한정했을 때 최상위권에 있는 < 일반통계학 > 과 < 미적분학 >, < 맨큐의 경제학 >, < 서양음악사 > 도 여전히 반갑습니다 . 기분 좋은 의미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. 학부생이나 대학원생이나 3 월에 총 대출권수가 가장 많은 것도 눈에 띕니다 . 학기 초라 교재를 대출해서라고 하기엔 9 월보다 월등하게 높은 수치입니다 . 캠퍼스에 낭만도 다시 살아나고 , 책 좀 읽어야지 하는 다짐도 들어서 일까요 ? 세월 저편의 저도 그랬던 것 같아 잠시 혼자 미소지어 봅니다 . 사람이 사는 모습 , 그리 다르지도 않고 잘 변하지 않단 생각에 마음이 편해집니다 . 그런데 자세히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네요 . 문학 이외의 대출도서를 살펴보면 인공지능 , 뇌과학 , 불안 , 마음 , 죽음 , 친화력과 같은 단어가 들어간 책들로 가득합니다 . 인간 내면에 대한 관심의 증대 , 빠른 사회변화로 인한 불안감도 크지만 그 안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이 느껴지는데 이건 20 년 전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라 사회학자에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을 남깁니다 .
| 5. 내가 좋아하는 10 권의 책
유학시절 페이스북에서 인생 책 10 권을 소개하는 릴레이가 펼쳐진 적이 있습니다 . 지인이 저를 태그 했길래 저도 목록을 남긴 적이 있는데 , 유학시절이라 ‘ 엄근진 ’ 해서였을까 기초 사회 통계 교재 , 불평등관련 교과서도 포함시키는 ‘ 만행 ’ 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. 이번 원고청탁 과정에서도 10 권의 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. 이를 바탕으로 도서관에서 훌륭하게 구축한 LikeSNU 상에서 책들의 네트워크를 확인해보려 한다는 야심찬 (!) 계획도 들었습니다 . 제 전공분야 책 10 권을 추천하면 그림은 명확하고 멋지게 나올 거라 확신합니다 . 전문가임은 극구 부인하나 어쨌든 ‘ 사회학자 ’ 타이틀을 달고 사는 입장에서 불평등 관련 도서 10 권을 적어낼 준비 ( 이게 아마 담당자 선생님께서 애초에 생각했던 방향이 아니었나 싶네요 ) 를 끝마치고 원고 첫 장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.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저는 40 대 사회학자가 아니라 ‘ 아직 거기에 사는 ’ ( 요새 데이식스 노래에 푹 빠져 삽니다 . 이해해주세요 ) 20 대의 기억으로 빠져 들어갔습니다 . 그때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밤을 새며 읽었던 책 , 작정하고 집어들었으나 다 읽는데 1 년이 넘게 걸린 책 , 이런 책을 쓸 수 있는 사회학자가 되고 싶단 마음이 들게 해준 책 , 이런 책들이 쌓여서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( 여전히 지식인은 아닌 ) 제가 된 게 아닌가 싶네요 . 이렇게 생각하니 LikeSNU 책 네트워크가 하나로 연결되지 않는 , 고립된 노드 ( 책 ) 들이 둥둥 떠 있는 그런 독서의 궤적도 아름다운 게 아닐지 , 효율성이나 지식의 축적만으로 이해할 수 없는 잡식이 주는 풍요로움을 적어도 대학시절에는 권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. 2025 년 1 월 제 기억을 스치고 지나가는 , 아니 그 기억 속 어디에 파묻혀 제 생각과 행동에 조금씩 묻어나오는 책 열권을 살짝 소개해드리겠습니다 .
1~2) 조은, < 사당동 더하기 25>, <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 >
사회학자 조은의 < 사당동 더하기 25> 는 한국사회의 하층계급을 대변하는 정금순 할머니 가족 3 대에 걸친 빈곤의 기록입니다 . 전쟁 , 재개발을 거치며 늘 밀려나야 했던 이 가족의 연대기는 대한민국의 수립과 성장의 연대기이며 , 그 안에서 잊힌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. 또 ‘ 한강의 기적 ’ 이란 서사에 가린 , 지극히 예측 가능한 계급 재생산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. 저자는 1980 년대 중반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철거가 예정된 사당동의 무허가 주택에 사는 이들을 연구 대상으로 만나게 됩니다 . 정할머니 가족은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. <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 > 은 그때의 기록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. 그렇게 시작된 저자와 이 가족의 인연은 지금까지 40 여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. 따뜻한 시각으로 차가운 현실을 보여주는 ,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습니다 . < 사당동 더하기 25> 에는 저자가 직접 연출한 ‘ 사당동 더하기 22 ’ 란 제목의 DVD 가 붙어 있습니다 . < 도시빈민의 삶과 공간 > 을 처음 읽었던 건 2002 년 봄 , 장소는 인문대 2 동 앞 벤치였습니다 . 제 삶의 방향이 어렴풋하게나마 결정된 순간이었습니다 .
3) 스티븐 레비츠키 , 대니얼 지블랫 , <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>
하버드대의 정치학자인 레비츠키와 지블랫이 쓴 이 책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진 책이라 많은 분들이 읽어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. 저 역시 2017 년에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읽어봤습니다 ( 참고로 원서도 영어공부하기 참 좋습니다 . 어렵지 않게 우아하고 깔끔한 문장들이란 !). 그렇게 잊고 지내다 최근 어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다시 꺼내 보았습니다 . 저자들은 ‘ 정치적 양극화 ’ 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왔던 규범이 무너지고 법이 허락하는 모든 걸 다 동원해서 대결하려는 태도 ( 헌법적 강경성 ) 의 증대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여러 국가의 사례를 바탕으로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. 무척 재미있게 읽었던 책인데 이번엔 좀 무거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습니다 . 12.3 계엄 이후 한국사회 ,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방향성을 고민하는데 있어 누구에게나 도움이 될 만한 책입니다 .
4) 이회 , < 기출변형가족 >
이 책은 1983 년생 법원 공무원인 미혼 남성과 보육원에서 자란 13 살 소년이 맺은 관계의 기록입니다 . 후원자에서 시작해 동거인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는 한 소년의 성장담이자 저자의 30 대를 관통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. 늘 마음속으로나마 비슷한 꿈을 갖고 있기에 따뜻한 결말을 기대하며 책을 펼쳤지만 끝은 지극히 현실적입니다 .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이래저래 많은 과제를 남기는 이 책은 특히 미혼과 1 인 가구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가족형태를 꿈꾸는 사람들이 한번쯤 펼쳐 봐도 좋을 것 같은 책입니다 . 저자의 글맛도 좋아 앉은 자리에서 새벽까지 다 읽었습니다 . 오늘 소개하는 열권의 책 중 가장 최신작이며 가장 덜 유명한 작가의 책이지만 그 재미와 의미는 결코 다른 추천서들에 뒤지지 않습니다 .
5) 스티븐 킹 , < 유혹하는 글쓰기 >
세계적인 미스터리 작가가 쓴 글쓰기에 대한 책으로 읽히는 글을 쓰고 싶은 사람들에겐 보석과도 같은 조언들을 담고 있습니다 . 물론 단기간에 글쓰기 실력을 키울 수 있는 꿀팁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. 오히려 지극히 원론적인 , 그래서 우리가 간과하는 부분들을 조목조목 지적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. 미국에서 박사과정에 있을 때 사회학과의 ‘ 글쓰기 세미나 ’ 의 주교재 중 하나였습니다 . 분야와 무관하게 읽히는 글들의 공유된 속성은 존재한다고 할까요 . 저자의 풍부한 글쓰기 경험이 사례로 담겨 있어 에세이로 읽어도 충분한 재미를 주는 책입니다 .
6)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의 <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>
바야흐로 데이터의 시대입니다 . 점차 우리의 일상이 데이터로 기록되고 , 다시 일상을 주도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. 수많은 데이터들이 분석되어 우리 앞에 ‘ 진실 ’ 이라며 주어지는 오늘날 , 데이터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, 그것을 조금은 쉬운 언어로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감을 갖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. <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 > 는 이러한 통찰력을 주는 사례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. 세상만사를 데이터로 읽어내는 즐거움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. 아울러 사람들을 만났을 때 여기 나온 사례 몇 개만 이야기해도 상당히 똑똑해 보일 수 있습니다 .
7) 은희경 , < 새의 선물 >
2001 년 여름에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. 한 여자의 , 아폴로 11 호가 달에 착륙했던 1969 년과 소설이 출간되었던 해인 1995 년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. 솔직히 정확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. 다만 빠져들어 읽었던 그 순간의 기억만은 또렷합니다 . 사실 이 책이 일종의 ‘ 인생 책 ’ 으로 남은 이유는 책과 함께 했던 추억 때문입니다 . 2002 년 초여름 , 비수기인 용평의 한 콘도에 엎드려 이승환 7 집에 실린 ‘ Christmas Wishes ’ ( 여름에 크리스마스 노래를 듣는 감성이란 !) 를 무한 반복해 들으며 읽었던 책 , 그때 함께 했으나 이제는 연락이 닿지 않는 친구는 지금 잘 지내고 있을지 궁금합니다 . 독서경험에 의미를 불어넣어줄 사람 , 공간 , 시간을 찾는 것도 지나고 나면 꽤 괜찮은 추억으로 남는 것 같습니다 .
8) 고원정 , < 빙벽 >
아직 군사주의 문화가 사회에 강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던 중학교 1 학년 시절 (1994 년 ) 에 접하게 된 책으로 1960 년대 제주도와 1980 년대 초 군사정권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. 어른들이 읽는 아홉 권짜리 대하소설을 꼬마가 무협지의 속도로 읽어낼 수 있었을 만큼 굉장히 흡입력 있는 책입니다 . 요즘은 거의 활동을 하고 있지 않지만 작가는 1990 년대엔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고 ,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를 진행할 만큼 인기가 많았습니다 . 개인적으로 이 책이 다루고 있는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많은 때여서 읽게 되었는데 덕분에 개인과 조직 ( 군대 ) 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. 하나의 부작용은 이때부터 군에 입대할 때까지 약 9 년여 동안 군대공포증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입니다 . < 토지 > 나 < 장길산 >, < 객주 > 같은 대하소설에 비해 문학적 완성도가 높진 않지만 제 기억 속에선 더 강렬하게 남아 있습니다 .
9) 김우창의 < 지상의 척도 >
문학평론가인 김우창의 첫 책이자 이분을 이야기 할 때면 늘 회자되는 < 궁핍한 시대의 시인 > 이 아닌 두 번째 저서인 이 책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그곳에 실린 한 편의 글 때문입니다 . ' 예술과 초월적 차원 ' 이란 글의 첫 두 페이지는 하나의 글로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. 김우창의 글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. 미문도 아닙니다 . 오히려 모래를 씹는 것 같은 서걱거림이 느껴집니다 . 그러나 읽다보면 그 사유의 깊이에 푹 빠지고 맙니다 . 중고등학교 시절 , 아니 대학에 와서도 잠깐 동안 제 꿈은 문학평론가였습니다 . 이 책을 읽고 평론가가 되어보고 싶다는 꿈을 완전히 접었습니다 . 영원히 이런 글은 쓸 수 없을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. 그래서 더 고마운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. 온전히 독자로만 다가갈 때 , 책을 읽는 행복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.
10) 장영희 , < 내 생애 단 한번 >
2000 년대 초만 해도 집에서는 인터넷 속도가 느려서 수강신청을 위해 중앙전산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. 특히 인기강좌의 경우 2-3 분이면 마감이 되기에 ‘ 속도전 ’ 은 필수였습니다 . 저도 소위 인기강좌를 한번 수강해보기 위해서 결국 중앙전산실 앞에서 밤을 지새우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. 2001 년 겨울 , 저녁 7 시 반쯤 전산실 정문 앞에 섰고 몇 시간이 지나자 어림잡아도 500 명은 넘는 사람들이 제 뒤로 서 있었습니다 . 그 뿌듯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. 아침이 오길 기다리며 가로등 불빛에 기대어 봤던 책이 바로 장영희의 < 내 생애 단 한번 > 입니다 . 어릴 적 소아마비에 걸려 장애의 편견을 견디고 , 넘어서며 번역가이자 손꼽히는 에세이스트가 된 저자 ( 영문학 교수 ) 의 글은 무척 담백합니다 . 어깨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고 할까요 , 아니면 솔직하다고 할까요 . 책의 뒷부분에 실린 ‘ 킹콩의 눈물 ’ 을 읽으며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던 스무 살을 떠올려봅니다 . 책장을 덮고 감동에 젖어있을 때 중앙전산실의 문이 열렸습니다 . 저는 일등으로 달려 들어갔으나 처음 고른 컴퓨터가 먹통이라 다른 컴퓨터로 옮기는 사이 이미 수강하고자 했던 인기강좌는 마감이 되어버렸습니다 , 설상가상으로 책상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도 누군가 훔쳐가 버렸습니다 . 이 책이 아니었다면 최악으로 남았을 그날의 기억은 , 이 책 덕분에 아름다운 추억이 되었습니다 . 아직도 꼭 5 권은 연구실에 ‘ 상비 ’ 하며 , 삶의 고단함을 호소하러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한권씩 안겨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.
| 6. 맺음말
처음 의도와는 달리 ‘ 의식의 흐름 ’ 과도 같은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. 요청받은 분량의 1.5 배가 된 것은 덤입니다 .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입니다 . 뭐든 읽으시고 , 가능하면 다양하게 읽으시길 바랍니다 .
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저도 서울대 중앙도서관의 책장에 꽂을 수 있는 , 그래서 누군가 꺼내볼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. 이렇게 새로운 도전이자 꿈 하나를 부끄럽게 적으며 글을 닫습니다 .
정인관
숭실대학교 정보사회학과 교수.
서울대학교 사회학과에서 학사와 석사를, 예일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았다.
디지털 불평등, 사회이동, 교육사회학, 양적연구방법론 등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고 있다.